
영화 「더 배트맨(The Batman, 2022)」은 단순한 히어로 영화가 아니다. 매트 리브스 감독은 고담시라는 거대한 도시를 ‘인간의 내면’으로 치환하며, 도시 건축을 통해 정의, 죄, 그리고 고독의 구조를 시각화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배트맨의 심리가 아니라, 그 심리를 담아내는 ‘공간’이다. 이 글에서는 고담시의 건축이 어떻게 인간의 어둠과 정의의 양면성을 드러내는지를 건축적 시선에서 분석한다.
1. 고담시의 건축 – 어둠의 심리학
고담시는 배트맨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곳의 건물들은 언제나 어둡고, 빛보다 그림자가 더 길게 드리운다. 건축적으로 고담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심리의 건축물’이다. 좁은 골목, 무너진 벽돌, 낡은 철문, 낮은 천장—이 모든 요소가 인간 내면의 불안과 상처를 시각화한다. 매트 리브스 감독은 고담시를 ‘정신적 공간’으로 설계함으로써, 배트맨의 내면 세계를 외부화했다.
이 도시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항상 비가 내리고, 거리는 젖어 있으며, 건물의 표면은 어둡게 녹이 슬어 있다. 이러한 질감은 브루탈리즘 건축의 거칠고 사실적인 재료감을 떠올리게 한다. 브루탈리즘의 콘크리트처럼, 고담의 건축도 ‘감정을 숨기지 않는 정직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도시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2. 고딕 리바이벌 – 신과 인간의 경계
더 배트맨의 건축 스타일은 전통적인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다. 높은 첨탑, 뾰족한 아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은 중세 성당을 연상시키지만, 그 안에는 신성보다는 죄와 슬픔이 가득하다. 이 영화에서 고딕 건축은 ‘신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죄책감’을 수직적으로 쌓아올린 구조다.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바로 그 고딕 구조의 일부다. 그는 인간의 고통 위에 세워진 성당 같은 인물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그의 여정은, 마치 고딕 건축의 첨탑이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듯,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간의 본능을 상징한다. 고딕 건축은 위로 향하지만, 그 뿌리는 항상 어둠 속에 박혀 있다. 바로 그 이중성이 배트맨의 세계를 지탱한다.
3. 웨인 타워 – 권력의 고립된 건축
웨인 타워는 고담시의 중심에 위치한 상징적 건축물이다. 높이 솟은 그 건물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지만, 동시에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건축적으로 웨인 타워는 ‘권력의 감옥’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고립이 깊어지고, 위로 향할수록 외로움이 커진다. 이 구조는 부와 권력이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비워버리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건축학적으로 웨인 타워는 ‘수직적 고립 구조(vertical isolation)’를 따른다. 그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며, 외부와의 연결 통로는 제한되어 있다. 이는 권력과 인간성의 단절을 상징한다. 배트맨은 그 높은 타워를 자신의 은신처로 사용하지만, 그곳은 동시에 ‘감정이 닿지 않는 차가운 성채’이기도 하다.
4. 도시 하부 구조 – 죄와 기억의 미로
고담의 하부에는 거대한 지하 구조물이 존재한다. 지하철, 배수관, 폐허가 된 터널 등은 도시의 ‘무의식’이다. 이 하부 공간은 영화에서 가장 어두운 장소로, 인간의 죄와 기억이 퇴적된 심리적 미로를 상징한다. 도시의 상층부가 권력과 질서를 상징한다면, 하층부는 혼돈과 진실을 숨긴다.
이 지하 공간의 구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과 닮아 있다. 억눌린 욕망과 기억이 쌓이고, 그것이 결국 폭발해 도시를 파괴한다. 건축적으로 이는 ‘기억의 아키텍처(Architecture of Memory)’로 읽을 수 있다. 고담의 지하는 잊힌 진실이 잠든 공간이며, 배트맨은 그 공간을 끊임없이 탐험하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5. 빛과 비의 건축 언어 – 정의의 색채
영화 전반에 걸쳐 빛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의 불빛은 붉고, 비는 끊임없이 내린다. 이 조명 연출은 건축적으로 ‘빛의 윤리학’을 시각화한다. 배트맨의 정의는 순수한 백색광이 아니라, 피와 죄의 색이 섞인 붉은 빛이다. 즉, 정의의 공간조차 완전한 순수함이 아닌, 타락과 고통 위에 세워져 있다.
비는 건축의 표면을 끊임없이 적시며, 도시의 질감을 바꾼다. 콘크리트 벽은 물에 젖어 윤기가 돌고, 네온사인은 빗물에 반사되어 현실과 환상을 섞는다. 이 ‘젖은 건축’은 인간의 감정, 특히 슬픔과 죄의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매트 리브스 감독은 고담을 ‘비로 세례받은 도시’로 만들어, 정화되지 못한 정의의 아이러니를 건축적 질감으로 표현했다.
6. 결론 – 건축은 인간의 내면을 닮는다
영화 「더 배트맨」의 고담시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건축적으로 형상화한 도시다. 수직적 타워는 권력과 고립을, 지하의 미로는 무의식과 죄를, 그리고 비로 젖은 벽은 감정의 흔적을 상징한다. 이 도시의 건축은 완벽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인간의 진실이 깃들어 있다.
결국 고담의 건축은 인간의 심리 지도를 닮아 있다. 도시의 구조가 인간의 정신을 규정하고, 인간의 감정이 다시 도시의 형태를 바꾼다. 건축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감정의 기억이 응축된 조형물이다. 매트 리브스는 도시를 하나의 건축물처럼 설계함으로써,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공간으로 제시했다. 더 배트맨은 결국 말한다. “도시는 영웅의 얼굴을 닮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건축의 형태다.